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타이라 가문|헤이시]] 추도 === 주에이 3년(1184년) 정월 20일,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요시츠네의 병력이 '''우지가와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기소 요시나카]]를 쳐서 죽였다. 풀려난 고시라카와인은 곧 셋쇼 마쓰도노 모토이에를 해임하고 21일에 구교 의정을 열었다. 최대의 의제는 세력을 회복하여 후쿠하라까지 진출한 헤이케에 어떻게 맞서느냐 하는 것이었다. 오이노미카도 쓰네무네(大炊御門経宗)와 도쿠다이지 사네사다(徳大寺実定)는 고시라카와인의 뜻에 따라 추토를 주장했고(《교쿠요》 정월 22일조), 출석자 대부분이 삼종신기의 안전을 위해서 사자를 파견하자는 의견을 비친 가운데 인의 근신이었던 후지와라노 도모카타(藤原朝方)·미나세 지카노부(水無瀬親信)·타이라노 지카무네(平親宗)도 >“오로지 정벌만이 있을 뿐"(偏に征伐せらるべし) 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법황의 바램"(法皇の御素懐)(《교쿠요》 정월 27일조, 2월 2일조)에 의한 것으로 26일, 타이라노 무네모리 추토를, 29일에 기소 요시나카 잔당에 대한 추토를 명령하는 선지가 내려졌다(《교쿠요》 2월 23일조). 헤이케가 정권에 복귀하면 다시 인세이가 정지되고 유폐당할 것을 고시라카와인은 두려워했다. 2월 7일에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요시츠네의 겐지군은 '''이치노타니(一ノ谷) 전투'''에서 헤이케군을 궤멸시켰다. 고시라카와인은 포로가 된 타이라노 시게히라를 송환하는 조건으로 타이라노 무네모리에게 신기의 반환을 요구했는데(《교쿠요》 2월 10일조). 이에 대한 무네모리의 답변은 >“6일에 슈리노곤노다이후{수리권대부(修理権大夫), 후지와라노 치카노부(藤原親信)}로부터 화평 교섭을 행할 것이라는 서장을 받았다. 전투를 하지 말라고 한 인센을 지켜 사자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는데, 7일에 겐지가 불의에 습격해왔다” 는 내용이었다{《[[아즈마카가미]]》(吾妻鏡) 2월 20일조}. 사실이라면 고시라카와인의 모략이 전투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2월 25일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헤이케 추토와 도고쿠(동국) 안정을 위해 고시라카와인에게 도카이・도산・호쿠리쿠도 여러 쿠니에 고쿠시(국사)를 보임해줄 것과 키나이(畿内) 인근 쿠니에서 군사를 동원할 것을 아뢰었다(《아즈마카가미》 동일조, 《교쿠요》 2월 27일조). 그러나 지난해부터 헤이케나 기소 요시나카에 의한 거듭되는 군사 동원 · 병량미 징수로 이미 교토의 피폐한 상황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간토의 위세를 등에 업은 무사들의 횡포도 빈발하자 무사들의 단속 및 군량 징수 정지를 명령하는 선지가 내려졌고(《교쿠요》 2월 23일조, 《아즈마카가미》 3월 9일조), 29일에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서국 낙향이 늦춰지게 되었다(《교쿠요》 동일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